전력은 남는데 왜 불안할까? 블랙아웃의 역설

최근 상황을 보면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와 고효율 발전 설비가 빠르게 늘고 있어 전체 설비 용량은 나날이 증가하기 마련이고, 역대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는 분석이 잇따른다. 다만 용량이 늘었다고 해서 곧장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여름철 냉방 수요가 갑자기 치솟는 환경에선 순간 부하 불균형이 블랙아웃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경고도 함께 나온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계산만 놓고 보면 분명 수급은 남아돈다. 그러나 에너지 당국은 여전히 ‘블랙아웃 비상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여기엔 분명한 물리 법칙이 숨어 있다. 전기는 생산과 소비가 동기화돼야 한다. 팔짱 낀 채 창고에 쌓아 두었다가 꺼내 쓸 수 있는 상품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의 출발점이다.

한낮 태양광이 과잉일 때 계통 주파수는 50 Hz(혹은 60 Hz)에서 위로 쏠리고, 해가 지면 급전 수요가 몰리며 주파수가 곤두박질친다. 잔뜩 배선된 발전기를 수초 만에 ‘켤 수도, 끌 수도’없기 때문에 상한선과 하한선 사이가 조금만 벗어나도 계통은 자동으로 차단 스위치를 당긴다. 풍부한 전력이 오히려 ‘안 쓰면 불안’한 시추에이션이 등장하는 이유다.

과잉 전력이 만드는 역설적 위험

유럽 재생에너지 상위국을 보면 역설이 분명해진다. 독일은 2023년 총 발전량 대비 17 %를 해외로 내보내야 했다. ‘남아도는 전력’이 가격을 마이너스로 떨어뜨려 상대국에 “돈까지 얹어 줄 테니 받아 달라”는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여름 한낮, 발전량이 부하를 초과해 버리면 송전선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과열되고, 이때 자동 차단 장치가 계통을 떼어 내면서 지역 단위 정전이 도미노처럼 이어질 소지가 생긴다.

반대 극단도 존재한다. 미국 캘리포니아가 대표적이다. 태양광 과잉으로 낮에는 전력 가격이 ‘공짜’ 수준까지 내려가지만, 석양이 지자마자 급경사로 올라가는 수요 곡선—일명 오리 배—을 맞추지 못해 긴급 예비력을 풀어야 한다. 한쪽에선 ‘전력 낭비’, 다른 쪽에선 ‘전력 부족’이 동시에 일어난다. 에너지 과잉 시대에 생겨난 아이러니한 블랙아웃 공포다.

산업과 시장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신호

이 역설은 전력시장 가격에도 기묘한 흔적을 남긴다. 한국 전력거래소 기준 2024년 하반기, 낮 11시태양광 피크 시간대 SMP(도매가격)는 kWh당 –4원으로 전락한 날이 22일이나 됐다. 이런 경우 가스 복합 발전소들은 출력을 줄였다가 오후 6시에 다시 최대 부하에 근접시키느라 가동률이 널을 뛴다. 잦은‘시동·정지’는 효율 저하와 설비 스트레스를 높여 정작 예비력으로 써야 할 내구성을 축낸다.

제조업 역시 불확실성을 떠안는다. 전력 초잉여 구간에선 전기를 버리는 코스트가 생기고, 피크 구간엔 전력요금이 치솟아 조업 계획을 재조정해야 한다. 부산·울산 일부 공장은 ‘태양광 정오 타임세일’에 맞춰 고열로 처리하는 공정을 대낮에 집중시키고, 야간엔 전기요금 급등을 피해 인력 중심 작업으로 넘어가는 스케줄링을 도입했다. 생산 캘린더가 태양의 각도에 좌우되는 시대가 열린 셈이다.

블랙아웃을 피하려면 속도보다 의외로 저장과 완충이 필요하다

답은 의외로 더 빠른 발전이 아니라 느긋한 저장에 가깝다. 전력이 남을 때 받아 주고, 부족할 때 꺼내 쓰는 대규모 배터리·양수식 저장소가 새로운 베이스캠프로 주목받는 이유다. 대규모 배터리 ESS와 양수식 발전은 원리가 단순하다. 남을 때 받아 두었다가 모자랄 때 꺼내 쓰는 거대한 전기 저금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 이 저금통이 주목받는 까닭은 순간 대응력에 있다. 

리튬 철인산 배터리 군(群)은 관성 회전기가 없는 대신 1초 이내로 출력을 밀어 올려 주파수 낙폭을 붙잡아 준다. 호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150 MW 배터리는 첫 해에만 잦은 변동으로 발생한 계통 손실 비용을 40 % 가까이 줄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양수식 발전은 반대로 ‘시간 지우개’ 역할을 한다. 낮에 물을 위로 끌어올리며 잉여 전력을 소모하고, 해 질 녘 수요가 치솟으면 물을 흘려보내 최대 10시간까지 안정 전력을 뽑아낸다. 국내 청송 1GW급 양수식 저장소 확충안도 이런 이유로 속도를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산업부의 계통 안정화 TF는 2025년 이후 재생 발전량의 일정 비율을 저장·수요관리 자원으로 흡수하는 방안을 시뮬레이션 단계에서 검토 중이다. 일각에서 거론된 발전량 10 % 상한은 초안 시나리오일 뿐, 법령·고시로 확정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업계는 비중이 크든 작든 ‘저장 의무’가 현실화될 가능성에 미리 대비하고 있다.

산업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 논의가 확정되면 배터리 셀·PCS(전력변환장치) 업체는 투자 명분을 얻고, 재생에너지 발전사는 초기 투자비 계산을 다시 해야 한다. 반대로 전력 계통 운영자는 주파수·전압 관리 부담을 덜 수 있어 긴급 예비력 투입 요건을 완화할 여지를 기대한다.

궁극적으로는 '전기를 얼마나 생산하느냐'보다 언제, '어디에 담아 둘 수 있느냐'가 산업 경쟁력을 가를 전망이다. 속도를 높여 생산량을 늘리는 일만으론 블랙아웃 공포를 없앨 수 없다. 여유를 품은 완충 장치와, 소비 습관을 한두 템포 늦추는 문화가 에너지 과잉 시대를 지나는 가장 현실적인 안전벨트가 될지도 모른다.

더 근본적으론, 저장과 완충 쪽으로 에너지 노선이 바뀐다는 가정 하에 전기를 쓸 때보다 언제 쓸지를 설계하는 방향으로 산업 체계가 재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초저녁 TV시청이 몰려 있던 1990년대와 달리, 이젠 오후 3시에 집에서 전기차를 충전하고 밤 열한 시에 전기로 보일러를 돌리는 생활 방식으로 고정될 수도 있다.

마치며

결국 블랙아웃 공포는 '전기가 모자라서'라기보다 '전기를 어디에 담아 둘지가 불분명해서' 생긴다. 에너지 과잉 시대를 살아가는 기술·정책·기업의 숙제는 속도를 높여 생산량을 더 늘리는 게 아니라, 여유를 확보해 흘러넘침도, 바닥남도 없도록 만드는 완충 장치에 있다. 그리고 그 완충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리 역시 소비 습관을 한두 템포 늦추는 연습이 필요하다. 빛이 넘쳐나도 감전될 수 있고, 풍력 날개가 세차게 돌아도 눈 깜빡할 새 칠흑 같은 암전이 올 수 있음을 잊지 않는 ‘적당히 느린’ 미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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