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 모노폴리, 기업들이 제공하는 기술은 정말 우리에게 중립적일까?

기술은 중립적인가?

“기술은 칼과 같다. 누가 쓰느냐에 따라 요리도, 흉기도 된다.” 자주 들리는 이 비유에는 빠진 전제가 하나 있다. 스마트폰 속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 손을 떠나 알아서 돌아간다. 잠금 해제와 동시에 알림이 폭주하고, 새벽 세 시에도 추천 영상이 쉼 없이 이어진다. 한국통신학회 조사에 따르면 평균 사용자는 하루 87회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그 가운데 3분의 1은 의식하지 못한 확인이라는데, 과연 도구가 중립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제조 단계에서부터 ‘어느 행위에 시간을 쓰도록 만들지’가 설계된다. 앱 버튼의 높이, 영상 재생의 속도, 글자 굵기까지 사용자가 어떤 행동을 맨 먼저 할지 계산한 결과다. 실리콘밸리 UX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단순히 버튼을 아래에서 위로 5 mm 올리는 것만으로도 주요 CTA-행동 유도 클릭률이 9 % 이상 상승한 사례가 있다. 즉 중립성을 자처하는 기술 장치 속엔 이미 “예상된 클릭”이 코딩돼 있다는 말이다.

행동을 설계하는 속도 기술

무한 스크롤이 등장하기 전, SNS 이용자는 한 화면을 다 읽으면 다음 페이지 버튼을 눌러야 했다. 클릭 하나가 귀찮아 보이지만, 그 순간 사용자는 “여기서 그만할까?”를 스스로 물어볼 기회를 얻었다. 무한 스크롤은 바로 그 멈춤의 순간을 없애 1인당 일일 체류 시간을 출시 첫해 대비 평균 56 % 증가시켰다. 사용자가 스스로 속도를 조절할 권한을 잃자, 콘텐츠 소비량은 편안한 늘어짐이 아닌 끝나지 않는 요청으로 변모했다.

전자상거래도 속도를 수익으로 환산한다. 0.3 초 빠른 결제가 연간 매출을 8 % 끌어올렸다는 한 쇼핑 몰의 사례는 유명하다. '3초면 결제 완료'라는 구호가 등장한 이래, 장바구니 화면은 점점 단조로워졌고 쿠폰 입력·옵션 변경 같은 고민 유발 요소는 더 깊은 단계로 밀려났다. 이른바 마찰 최소화 전략이다. 물론 사용자는 편히 산다. 다만 구매 여부를 다시 생각할 시간은 사라진다.

기업은 무엇을 설계하는가

영상 서비스는 ‘메가바이트’ 대신 ‘초’로 경쟁한다. 동영상 압축 코덱을 개선해 버퍼링을 1초 줄였더니 1회 시청 완료율이 12 % 높아졌다는 넷플릭스 테크 블로그가 이를 증명한다. 속도를 위한 데이터 센터 증설은 단순 인프라가 아니라 '다른 서비스와 비교조차 하지 않게 만드는' 일종의 진입장벽이다.

식료품 배송의 속도 경쟁은 더 급진적이다. 도심형 물류 거점 한 곳 당 평균 반경 2.5 km 내에 고객 4만 명을 품으면 20분 내 배송이 가능해진다는 내부 시뮬레이션이 발표됐다. 비용이 많이 드는 구조지만, 사용자는 한 번 즉시성에 길들여지면 하루 배송에도 불평한다.결국 기업 입장에선 ‘시간 자산’이 충성도를 지탱하는 토대다.

은행 앱 역시 ‘속도’를 업계 재편 레버로 쓴다. 한국금융 ICT 포럼에 따르면 지문 인증 한 번으로 투자 상품 가입까지 끝내는 기능이 등장하자 전통 은행의 모바일 가입 전환율이 2년 새 40 % 감소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의외로 단순하다. 즉 이 흐름은 보안과 편의 사이의 균형이라기보다는, ‘조금 느린 절차’가 비즈니스에서 퇴장당하는 흐름에 가깝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임 회사들은 기다림마저 설계한다. 퀘스트 보상을 즉시 주지 않고, 30분간 카운트다운을 띄우면 재접속률이 2배 이상 뛴다는 데이터는 업계 상식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간헐적 보상을 디지털로 옮긴 셈이다. 사람은 예측 가능한 보상보다, '이번에는 뭐가 나올까'라는 불확실성에서 더 강한 도파민을 분비한다.

기술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는 ‘넛지’ 개념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살짝 등을 떠미는 설계가 사람 행동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살짝’이 슈퍼컴퓨터의 계산 능력과 결합하면서 정말로 사람이 등 떠밀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단계까지 발전했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여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클릭한다고 느끼지만, 실은 이미 설계된 궤도 위에서 순항 중일 가능성이 크다.

속도는 시간을 아껴 준다. 그러나 시간을 가려 쓰게 하기도 한다. 즉시 결제가 편리한 대신, “내가 왜 이걸 샀지?”라는 뒤늦은 자각이 영수증과 함께 찾아온다. 주문서를 수정하려면 고객센터 메뉴를 찾아 아홉 번의 스크롤과 세 번의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하는 구조도 많다.

그러니 우리들의 질문을 바꿔 보자. '속도가 이득이냐 손해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도적으로 속도를 선택했는가'로 변화한 시대다. 기술이 아무리 빨라도, 사용자에게는 잠깐 멈춰 설 수 있는 비상구 하나쯤 남겨 두어야 할 듯하다. 속도를 마시는 일은 카페인의 힘을 빌려 달리는 것과 같다. 각성 효과는 빠르지만, 결국 어느 시점엔 물 한 잔과 휴식이 필요하다. 그 휴식을 찾아 주는 설계가, 다음 세대 기술이 풀어야 할 진짜 속도 문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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